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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사회적 위축과 고립

by 옛날문화와 인간심리 2025. 2. 15.

왜 우리는 왜 고독이나 사회적 위축 그리고 고립의 중요성을 알아야 할까? 작은 상상의 실험실을 꾸며보자. 적어도 1000분의 1 확률로 우리가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 행성에 도착했다고 상상하자. 이 사람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들은 어쨌든 이 행성에 거주하게 되었고,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이곳에 도착했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자. 사람들 간에 서로 끄는 힘이 전혀 없다. 이 사람들은 결코 함께 모이지 않고, 상호작용도 하지 않고, 함께 부딪히거나 충돌하는 일도 전혀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목표 없이 떠도는, 아마도 가끔 서로 바라만 보는 실체들일뿐이다. 지구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이 모든 실상이 재미있거나 지루하거나 충격적이라고 느낄 것이고, 아마도 이 행성의 미래는 암울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고독, 사회적 위축과 고립

고독이라는 존재의 이유

만일 사람들이 충돌하지 않고 서로 관계를 맺고 고독하게 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관계는 없어질 것이고, 인간 집단과 공동체, 언어와 문화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거나 다른 사람을 관찰하고 가치와 규범 법규에 대한 인지도 없을 것이다. 사회적 위계도 없어질 것이고, 타인의 마음을 읽거나 타인의 도움을 받거나 내가 도움을 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가 지역주민들에게 유아기에서부터 규범적인 사회문화적 기대에 나를 끼워 맞추면서 서로 돕고 나누고 돌보기등을 가르치고, 어떤 것이 선이고 악인지에 대해 소통하고, 이렇나 규범에 순순히 따르거나 위반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에 대해 가르친다고 상상해 보자.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잘하지 않는 사람들은 타인과 함께 있을 때 이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생물학적 소인을 타고난 것이라는 의견이 제안되었을 수 있다.

 

아마도 이 지역사회의 다른 구성원은 5-HTT 유전자 전사가 줄어들고 세로토닌 흡수율 감소에 대해서 읽었을 수도 있음, 세로토닌의 조절 효과 없이 편도핵과 시상하부, 뇌하수체, 부신피질에 이르는 시스템이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공포를 잘 느끼고 불안한 사람의 전형적인 신경학적 개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학습했을 수도 있다.

 

사회적 위축의 작용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고독에 순응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위축되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이들에게는 혼자 있으려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것 자체를 선호하도록 이끄는 생물학적 성향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들은 생명이 없는 대상이나 물건들과 함께 있을 때 상대적으로 더 긍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의 두 번째 사상 연습은 혼자 있는 사람들의 두 가지 '유형'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첫째는, 두려움과 거부가능성 그리고 사회적 평가를 예상하는 것에 대한 높은 민감성에 의해서 동기화되는 사람들이고, 둘째는, 고독에 대해 확실한 선호를 보이는 사람들이다.

 

혼자 있는 행동의 역학적인 원인이 어떤 것인지에 관계없이 타인과 협동하고 협력하며 돌봄을 주고받는 것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강한 신념이 있는 사회 안에서는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에 따르는 대부분의 사람은 상호작용이 결여된 사람들에 대해서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지역사회의 가설적인 반응이 사교적이지 못하고 순응하지 못하는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어떤 종류의 상호작용과 비상호작용적 순환주기가 만들어질 것인가?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지역사회의 반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 것인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고독을 찬미하는 사람

나는 고독을 찬미하는 수백 명의 다른 유명인사의 말을 인용해 보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아마도 왜곡되고 한계가 분명한 그리고 자아중심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누구든 옷장과 동굴 그리고 방에 감금되면서 생산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누구든지 고독을 좋아할 수 있으며, 우리 중 대부분은 탐구와 숙고 그리고 문제해결과 내성으로부터 야기되는 압력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고독이 필요하기도 하다. 앞서 첫 문단에 적었듯이, 고독을 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수용 가능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붙는다.

 

만약에 누군가 자발적으로 홀로 시간을 보낸다면, 자신이 원할 때 사회집단에 참여할 수 있다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핵심적인 다른 사람들과 긍정적이고 지지적인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할 수 있다면 홀로 있는 경험은 생산적일 수 있다. 하지만 홀로 있는 체험에 내가 부가하는 이러한 전제조건들은 꽤 핵심적이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고독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나 많은 얼굴은 발달적 시작과 경과 그리고 공변 요인들이 여러 가지가 있고, 서로 다른 맥락과 공동체, 그리고 문화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여기에 제시된 이런 전제조건들이 맥락과 공동체 그리고 문화와 상관없이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전제조건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과 충돌하지 못하는 것이 좋지 못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호작용은 양쪽이 모두 수용 가능하고,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편이 좋다. 이런 상호작용은 모두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